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바니아 독립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오스만 제국 측의 요청으로 1912년 12월부터 시작된 [[런던]] 회의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위시로 [[이탈리아 왕국]]과 [[독일 제국]]의 [[삼국 동맹]]은 "너희들끼리 알바니아를 분할하지 말고 독립국을 세우라"고 발칸 동맹국을 압박하였고, [[그리스]]를 제외한 발칸 동맹국들은 [[알바니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점령지에서 철수하였다. 그리고 독립국이 될 알바니아의 통치자로 독일의 [[귀족]] [[https://en.wikipedia.org/wiki/Wilhelm,_Prince_of_Albania|빌헬름 비트 공]](Wilhelm Friedrich Heinrich Prinz zu Wied)을 선정하지만, 주변국들과 열강의 복잡한 이해 관계와 맞물려서 회담이 장기화되는 사이, 제1차 발칸 전쟁이 재개되면서 알바니아 문제에 대해서는 명료한 결론을 내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뒤, 제2차 발칸 전쟁이 전개되고 있을 무렵인 [[1913년]] 7월, [[런던]]에서 주최된 6개국 대사회의에서 열강은 [[알바니아]]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이 회의의 결과를 토대로, [[세르비아]]는 옛 [[알바니아]] 영토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코소보]] 지역과 지금의 [[북마케도니아|마케도니아]]를 획득하였으나, [[아드리아해]] 진출은 좌절되었다. 그리고 [[세르비아]]는 자기들의 영토라고 주장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보스니아를 합병]]한 것에 이어 자신들의 아드리아해 진출까지 가로막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험악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으며, 1, 2차 [[발칸 전쟁]]과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과 함께 [[제1차 세계 대전]]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그 뿐만 아니라, 알바니아의 독립은 80여년이 지난 뒤의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코소보 전쟁]]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배경이 된다. [각주] [[분류:1908년/사건사고]][[분류:1909년/사건사고]][[분류:1910년대 사건사고]][[분류:오스만 제국의 역사]][[분류:알바니아의 역사]][[분류:독립전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